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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계속해서 클릭하고 있을까?
by Adam Pohlman
2020-03-19
마침내 아이들을 침대에 눕혔다. 평상시와 다름없이 지친 일과를 보낸 나는 뭔가 재미있는 게 없을까 하는 마음으로 SNS를 열고 살펴보기 시작했다.이곳저곳 클릭을 하면 할수록 나의 영혼은 점점 더 불만족의 구덩이로 빠졌다. 그게 무엇이든지, 뭔가 내 시선을 끌 대상을 찾았다. 그러나 어떤 것도 만족을 주지 못했다. 이미 가지고 있는 물건을 사라는 광고가 수도 없이 화면에 떴다. 정치 토론을 보니 화가 치밀었다. 화려한 꽃을 배경으로 한 최신 뉴스는 내 지친 영혼에 그 어떤 힘도 주지 못했다.내게 필요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계속 찾았다. 거기에 중독되어 있었다. 왜?이곳저곳을 클릭하고 찾아봐도 별다른 게 없다는 것을 알면서 우리는 왜 마우스 클릭하는 것을 멈추지 못할까? “이 정도면 충분해!”라고 내 마음이 외치는데도, 왜 내 손가락은 계속 움직이는 걸까?오래된 문제종종 삶이 지겹게 느껴진다. 일찍 일어나 온종일 일을 하지만 꾸중을 듣기도 한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자고 일어나면 또 다시 같은 일상이 반복된다. 매일매일, 언제나 똑같다. 우리는 이런 단순한 일상을 깨고 싶다. 그래서 소파에 몸을 묻고 넷플릭스 최신 드라마를 보거나, 의자에 앉아 그날 신문을 뒤적인다. SNS를 열고 다른 사람들의 인생은 어떤지 들여다본다. 뭔가 새로운 것을 향한 열망은 쉽게 소모적인 행동으로 바뀐다.스트리밍 영화와 비디오 게임, SNS가 주는 악영향에 맞서 싸워야 한다. 새롭고 흥미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오래된 습성이다. 바울은 사도행전 17장, 아테네에서 전도할 때 바로 이 문제에 직면했다.동역자를 기다리는 동안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바울은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에 자극을 받았다(행 17:16). 거짓된 신을 예배하는 것으로 가득 채운 것은 어리석은 남자들과 여자들이 아니었다. 나름 위대한 철학으로 무장된 사람들에 의한 우상숭배였다. 위대한 철학자들은 아테네의 언덕(Areopagus)에 모여서 세계관을 토론했고, 또 사회를 위해 가장 좋은 종교가 무엇인지를 탐구했다. SNS의 고대 형태라고도 할 수 있는 이곳에서는 세상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나누는 모든 형태의 의견이 다 환영받았다.그들은 자신의 지식 창고를 채우고, 대화를 더 풍성하게 만들어줄 최신 트렌드와 뉴스를 갈망했다. 온종일 더 큰 흥미를 가져다줄 새로운 정보를 찾아서 보내곤 했다.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행 17:21). 아테네 사람들은 항상 뭔가를 찾았고 결코 만족할 줄을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기꺼이 그들의 식탁에 초대했다. 그에게서 뭔가 재미있는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우리 귀를 간지럽히는 호기심아테네에서 바울이 설교한 주민들은 그가 나중에 디모데에게 말한 사람들과 비슷하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딤후 4:3). 우리는 이런 경고를 번영 복음을 가르치는 설교자 또는 컬트 종교 정도에만 국한한다. 하지만 바울이 그의 제자에게 경고하기 위해 선택한 단어는 그리스어 knēthō로서, 종종 가려움으로 번역된다. 이것은 새로운 것을 탐색하고 싶은 호기심을 묘사하는 것으로 어떤 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새롭고 신선한 정보 조각”을 향한 충동을 의미한다. NET 성경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해서 이 단어의 뉘앙스를 드러냈다. “그들은 욕망을 따르며, 또한 자신들을 위한 선생을 모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 새로운 것을 듣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만족하지 않는 마음을 드러낸다. 언제나 좋은 소식을 찾지만, 결코 찾을 수 없다. “스올과 아바돈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잠 27:20).새로운 소식을 위한 이 끝없는 여정은 미묘한 방식으로 우리 삶에서 드러난다. 현재 세상의 흐름에 대해서 최신 정보를 제공하는 지속적인 뉴스 피드, 운전하는 중에도 우리를 유혹하는 메시지 알림, 한 번 더 클릭하라는 웹 사이트 화면의 유혹, 친구와 함께 나누는 잡담, 최신 기계를 갖고 싶은 욕구, 최신 TV 드라마 또는 스포츠 이벤트에 관한 대화에서 뒤 쳐지고 싶지 않은 욕망.이런 욕망이 과거에 우리를 만족시킨 적이 없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같은 시도를 반복하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새로운 무언가를 찾고 있는가? 이렇게 쉬지 않는 호기심으로부터 누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끝없는 육체의 추구를 위해서 우리는 이 죄로 가득한 세상 밖에서부터 오는 뭔가가 필요하다. 다른 세상을 위해서 만들어진‘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서 C.S. 루이스(C.S. Lewis)는 이렇게 썼다. “이 세상 그 무엇도 만족시킬 수 없는 욕망이 우리 속에 있음을 누구나 알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설명은 우리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136-37). 우리의 욕망은 마치 부츠를 신고 운전할 때 느끼는 발바닥 가려움과 같다. 부츠를 신은 발바닥의 가려움은 그 어떤 것으로도 긁을 수 없다. 우리의 귀를 진정으로 만족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복음뿐이다. 새로운 소식이 만족하게 할 수는 없다. 오래된 이야기, 모든 세대에게 이미 들려진 최고의 소식밖에는 없다. 예수님만이 사탄의 속삭임과 공격하는 유혹을 피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을 이길 수 있었다. 승리의 부활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른 소식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헛된 노력에서 해방을 약속했다. 생명을 향한 유일한 길, 충만한 기쁨, 끊임없는 즐거움은 그를 따르는 것이다(시 16:11).육체의 욕망이 끄는 막다른 삶의 길에서 우리를 완벽하게 구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우리에게 성령과 그의 말씀을 주심으로 새로운 것을 향한 호기심을 해소하는 가장 분명한 소식, 그것을 언제나 상기할 수 있도록 하셨다. 수다 떨고 싶은 생각이 들 때, 운전하다가 막 도착한 메시지를 보고 싶을 때, 세상 현안이 궁금할 때,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이 당신 속에 풍성하게 거하도록 하라.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 107:9).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Scrolling for Significance번역: 무제
문화
세계관
중독
우상
욕망
복음
CS루이스
순전한기독교
빚을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법
by Paul Tripp
2020-03-05
수많은 사람이 심각한 빚 문제로 힘들어하고 있다. 빚 해결과 재정적 독립으로 가는 길이 급여 인상과 예산 수립, 그리고 투자라고 믿는다. 돈의 흐름을 아는 것은 우리를 지혜롭게 하고, 예산 수립으로 실천적인 도움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돈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시작점은 될 수 없다. 그것은 어린 소년에게 축구공 던지는 것은 가르치면서 축구 경기의 기본규칙을 가르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돈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빚을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할뿐더러 위험하기도 하다. 우리 삶의 모든 문제가 그렇듯이 빚 문제도 성경적 세계관에 근거해야만 한다. 우리의 생각을 교정하기 위하여 빚을 지는 행동과 소비 패턴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을 비추어 보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돈, 빚, 재정 운용 등의 이해와 실천 방식이 교정된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돈의 소유권 포기빚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루는 일은 돈의 교육과 예산 수립, 정보 제공 등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돈에 대한 소유권 포기로부터 시작한다. 삶이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면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돈을 원래의 목적으로 사용하지 못한다. 재난과 같은 돈 사용 습관을 결코 멈추지 못할 것이다.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설계를 반영하고 있다. 그분의 목적을 위하여 존재하고, 그분의 뜻을 수행할 임무를 받았다. 돈에 관하여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나름의 방식을 만들어내거나 일련의 규칙을 마음대로 정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우리의 개인적 행복을 실현하는 공간이 아니다. 우리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돈을 만든 것도 아니다. 우리가 돈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고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면, 빚은 없더라도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돈을 사용할 수 없다.우리 대부분은 돈의 문제를 안고 있다. 자신이 번 돈을 사용하는 것이라면 무엇을 하든지 괜찮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돈 문제는 우리가 돈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생각에서 야기되므로 우리는 괜찮지 않다. 돈을 다루는 건강한 생각은 돈을 창조하신 이와 그분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하는 데 있다.자족하는 소비빚은 근본적으로 과다지출의 문제가 아니다. 자족의 문제이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돈에 대한 사랑은 돈보다 더 큰 것에 연결되어 있다는 단서를 얻을 수 있다.“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6-10).바울은 돈의 문제를 자족에 대한 논의로 시작한다. 돈과 관련된 문제의 뿌리는 거기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안에 진정으로 자족하는 마음이 있을 때만 우리는 이기적 욕망을 따르지 않고 절제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오해하지 말라. 가족을 위해서 혹은 자녀를 잘 먹이기 위해서 사용하거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휴식을 위해 좋은 곳에서 쉬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것들을 사랑의 마음으로 하라고 하신다. 당신이 돈을 소비하는 방식을 생각해 보라. 얼마나 많은 욕심이 이를 주도하고 있는지 말이다.나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면 자족하게 된다. 자족하면, 소비를 통해 만족해하는 습관을 버리고, 과다지출로 발생하는 빚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개인을 위한 과다지출은 결코 행복을 지속시키지 않는다. 빚을 늘리고, 정서적이고 영적인 스트레스를 초래할 뿐이다.복음적 소망 빚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다. 나는 신용카드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특별히 사려고 하는 것이 없음에도 내 마음은 뭔가를 찾는다. 내가 필요치 않은 것에 여전히 마음을 빼앗긴다. 필요하지 않은 지출을 정당하게 포장하는 것에 능숙하다. 여전히 내가 돈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기에 돈 지출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이것이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매달리는 이유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새로운 시작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받는 사람이 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지배하는 자가 굴복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우리는 빚을 딛고 올라갈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돈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문을 우리에게 열어 준다. 선하고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강력한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하나님의 은혜만이 재정 문제에 있어서 우리에게 진정한 변화를 가져다준다. 빚이 아무리 산더미 같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크지는 않다. 돈 문제가 아무리 심각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심오하지는 않다.우리가 돈 문제에 당면하면 두려움에 빠질 필요가 없다. 무엇인가를 탓하며 우리의 불안을 풀어낼 필요가 없고, 소망을 버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소망으로 돈 문제를 대면할 수 있다. 현명하고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지혜가 있고 능력이 있는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속하여 변화시키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Debt Is Not a Money Problem번역: 정은심
세계관
빚진자
소유권
디모데
신용카드
돈과은혜
카이퍼 통신 1: 한국 교회의 후배들에게!
by 김은득
2020-03-03
한국 교회 성도 여러분, 혹시 손봉호, 강영안, 류호준의 공통점을 아십니까? 이들은 모두 제가 설립한 화란자유대학교(Vrije Universiteit, Amsterdam)에서 공부한 자타가 공인하는 카이퍼리안(Kuyperian)입니다. 한국 이외에 저의 모국인 네덜란드를 비롯하여 캐나다, 미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도 제가 가진 지식과 경험이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들었습니다. 돌아보니 거의 반세기(1870-1920) 동안 네덜란드 정치와 문화 영역의 중심에 서서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저는 목회자/신학자로서 출발했지만, 세상의 다양한 공적 영역에서 상당한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특히 기독교-민주주의적(Christian Democrat) 정치인으로서 정통 칼빈주의적 색채를 띠는 민중들(Calvinist Common Folk)을 정치적·문화적 소외로부터 해방하고, 억눌린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서 네덜란드 최초의 현대식 정당을 세웠습니다. 40년을 이끈 정당은 몇 번이나 집권에 성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가 총리까지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후대의 역사가 제임스 브랫(James D. Bratt)은 인류 역사상 침묵과 압제를 당하는 비주류가 스스로 목소리를 내도록 성공적으로 각성시킨 사례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의 흑인 인권 운동과 저의 정치적 활동을 제시합니다(James D. Bratt, “Abraham Kuyper’s Public Career,” Reformed Journal 37, 10: 9-12.). 비주류의 해방과 각성이라는 평가와 더불어 무엇보다 제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세속화되어가는 네덜란드에서 칼빈주의적인 기독교 세계관에 따라 공적 영역에 참여하면서도 종교가 다른 사람이나 비(혹은 반)종교적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념도 충분히 인정하도록 한 점입니다.이런 노력은 현대 네덜란드에서 이념적 기초에 따라 분류하여(verzuiling, pillarization) 정치사회를 구성하도록 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칩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다양하게 분열된 정치 구조 속에서도 국가 전체의 공공선(the common good)을 위해서라면 정파간에 상생과 타협을 이루었습니다. - Arend Lijphart, The Politics of Accommodation: Pluralism and Democracy in the Netherlands (Berkele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5). 이 책은 카이퍼가 구축한 현대 네덜란드의 범주화된 정치사회 구성이 적어도 1960년대까지 지속되었음을 보여줍니다 - 이 부분은 아마도 다원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교회가 종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기보다는 기독교 세계관에 충실하면서도 타자와 공생하고, 공공선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세속화되어가는 네덜란드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정치적 영역의 성공이 아이러니하게도 저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특히 1980년대 미국의 복음주의 목회자들이 제 경우를 보고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생겨난 오해들이 상당합니다.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라는 보수적 기독교 단체를 창설해 낙태 및 동성애 반대 운동을 일으켰던 제리 팔웰(Jerry Falwell) 목사는 1980년 대통령 선거 때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on)을 지지하면서 정치적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레이건의 당선에 이바지하면서 팔웰 목사와 제가 한 공적 활동의 유사성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유사성은 첫째, 저와 팔웰 목사 둘 다 지역교회 목사로 시작했지만, 국가 전체를 성경적 가치에 따라 개혁하기 위해 정치적 영역에 참여했습니다. 둘째, 개인의 경건을 최우선시하고 공적 영성에 무관심한 복음(개혁)주의자들을 각성시켜 동시대의 세속적 자유주의와 인본주의에 대항하도록 했습니다. 셋째, 국가 전체를 개조하기 위해 기독교 교육 운동을 전개하고, 풀뿌리 정치적 네트워킹, 기독교 대학(팔웰의 경우 Liberty University)을 설립하는 등 동일한 스텝을 밟았다는 것입니다. 1988년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직접 참여한 팻 로버슨(Pat Roberson) 목사 역시 저와 동일한 스텝을 밟았습니다. 그와의 유사성은 첫째, 시대와 문화에 뒤떨어졌다고 무시와 천대를 받으며 공론장의 주변부에 밀려나 있었던 기독교인들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제가 그런 목소리를 위해 신문(일간De Standaard, 주간De Heraut [The Herald])을 활용했다면, 로버슨 목사는 텔레비전(Christian Broadcasting Network)을 이용했습니다. 둘째,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한 대학교(로버슨의 경우 Regent University)를 세워 학문적 성과는 물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했습니다. 셋째, 기독교-민족주의적 비전(Christian-Historical Imagination)을 제시함으로 팔로워들이 정치사회적 활동, 특히 기독교적 가치에 합당한 법률 제정 활동에 영향을 끼쳤습니다(John Bolt, “Abraham Kuyper,” The Routledge Companion to Modern Christian Thought, eds. Chad Meister & James Beilby (London: Routledge, 2013), 86-87.). 이런 의미에서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James Davison Hunter)는 “1980년대 이후 미국에서 교회의 지배적인 공적 증거는 정치적 증거였다”라고 주장한 것입니다(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 정치신학의 한계와 가능성, 2014, 31).다원화된 네덜란드의 정치와는 달리 미국 복음주의 목회자들이 정치가로 전향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치적 이념에 기독교적 가치가 종속된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기독교적인 가치에 따라 정치적 입장을 선택한다고 해도, 매우 강력하게 이원화된 미국 정치 영역에 들어가는 순간 그것이 최선이든 차선이든 편향된 정치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팔웰 목사나 로버슨 목사 모두 공화당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행태를 보여주었습니다. 목회자들의 정치적 편향성 문제는 미국보다 한국 교회가 더욱 심각합니다.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제가 참여한 정치를 그런 편향성의 일례로 치부할까 염려됩니다. 물론 저도 한낱 인간에 불과하기에 그런 편향성이 없지 않았습니다만, 다원화된 정치 영역에서 분명하게 소신을 지키면서도 상생할 수 있는 길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고 행동했습니다. 저와 한국 목회자들의 정치참여가 다른 점은 무엇보다도 종교와 정치의 영역을 명확히 구분하고, 각각의 영역에서 근본적인 것을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진보정치를 따르는 목회자들은 자신이 선호하는 정치인을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현하는 메시야처럼 바라보며 정치를 종교화합니다. 반면 보수정치를 따르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뜻과 계시를 이용하여 자신이 혐오하는 정치인에 대한 표적 설교를 하거나 정파 편향적인 발언으로 종교를 정치화합니다. 즉 한국에서 목회자가 정치 무대에 나서면 나설수록 본질을 잊고 복음이 아닌 어느 정파의 대변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우려하는 것은 충분히 공감합니다. 저 역시 미국을 방문했을 때 한 지역신문사에서는 저의 기독교-민주주의적(Christian Democrat) 성향 때문에 민주당원으로 표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공화당이나 민주당 어디에도 속하지 않기에 그 표기를 빼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이런 정치적 편향성뿐만 아니라 복음주의자들의 정치참여가 실질적으로 미국 사회와 문화를 바꾸지 못했다는 것은 대부분의 미국 복음주의자들이 인정합니다. 기독교적 가치에 맞는 입법활동에 성공할 때마다 정치적인 승리에 도취하여 미국 기독교의 세속화를 가속했습니다.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작가인 로드 드레허(Rod Dreher) 역시 이 부분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유형의 기독교적 정치인 베네딕트 옵션(The Benedict Option)을 주창했습니다. 베네딕트 옵션은 입법활동이나 이슈 중심적인 정치참여에 주력하는 것은 충분치 않으며, 교회가 베네딕트 수도원과 같은 대항적 문화 공동체로서 변화를 위한 교회로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인격과 심성을 배양하기 위해서 베네딕트 규칙을 활용하고, 기독교 교육, 기독교 노동, 기독교 마을 등과 같은 하위문화의 소셜 네트워크를 실질적으로 형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베네딕트 옵션: 탈기독교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선택, 2017, IVP). 그런데 로드 드레허가 “탈기독교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선택”으로 제시하는 베네딕트 옵션을 저는 이미 실행했습니다. 미국 복음주의 목회자들이 정치에 참여할 때 - 저의 정치적 성공을 벤치마킹한 것이 사실일지라도 - 실질적으로 제가 조직한 하위문화의 소셜 네트워킹 부분을 영혼 없이 따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제가 정치적 승리를 쟁취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가 결성한 기독교적 소셜 네트워킹은 마틴 루터 킹 목사와 같은 일종의 해방 운동의 성격이 있습니다. 흑인 해방 운동처럼, 정치적 승리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 제가 대변하는 이들이 편견과 무시에서 벗어나 동등한 투표권, 공평한 수업 권리를 획득하는 것에 목적을 두었습니다. 이런 면 때문에 자타가 공인하는 카이퍼리안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는 1981년 암스텔담 자유대학교에서 개최된 기념 강좌에서 저와 해방신학의 유사성까지 주장할 정도였습니다(Nicholas Wolterstorff, Until Justice and Peace Embrace: The Kuyper Lectures for 1981 Delivered at the Free University of Amsterdam (Grand Rapids: Eerdmans, 1983).). 그리고 저의 공적 활동은 결코 개인적 경건과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신학적으로 가장 많이 공격한 부분이 바로 경건과 사회참여를 이원론적으로 분리해서 바라보는 루터주의(Lutheran)적 관점입니다. 제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제가 얼마나 애타게 그리며 목말라 했는지 궁금하다면 미국 칼빈신학교의 총장을 역임했던 제임스 드 용(James De Jong)이 최근 번역한 제 책을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Abraham Kuyper, Honey from the Rock: Daily Devotions from Young Kuyper, trans. James De Jong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8).).저와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정치참여를 올바르게 구분하여 살펴본다면, 이론만이 아니라 실제로 현실 세계를 변화시켰던 저의 공공신학이 한국 교회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지금 세속화의 위협 가운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보다는 세상만큼이나 악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심지어 세상이 한국 교회를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한국 교회의 공공성 회복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습니다. 공공성 회복이 미국 복음주의의 경우처럼 공적인 영역, 특히 정치적 영역에서의 영향력증가로 인식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는 것은 한국 교회가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때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왕권(Kingship) 아래 살아갈 때 가능합니다. 우리의 본질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Pro Rege! (왕을 위하여!)
카이퍼
세계관
공공신학
화란자유대학
바빙크
손봉호
강영안
도덕적다수
카이퍼리안
오스카는 외면했지만, 그리스도인이 주목해야 할 영화
by Brett McCracken
2020-02-20
‘저스트 머시’(Just Mercy), ‘다크 워터스’(Dark Waters, 3월 11일 국내개봉 예정), 그리고 ‘히든 라이프’(A Hidden Life)는 지난번 있었던 오스카상에서 그 어떤 부분의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2019년에 나온 이 영화들은 연말에 있는 각종 요란한 시상식에서 사실상 외면받았다. 이 영화들은 선명한 도덕성과 용기를 주제로 다뤘다는 점에서 주목받아야 한다. 특히 기독교인이라면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한다. 2019년 팝 문화에서 만나는 좋은 순간을 요약한 글에서, 나는 영화와 텔레비전에서 종종 만나는 “정의를 향한 포기하지 않는 열망”을 강조한 바 있다. “이 사회는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려고 하고, 우리는 현실에서 불의와 악이 가져다주는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비록 이런 현실에 있지만 우리는 완전한 정의를 향한 연합된 갈망이 여기저기에 있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2019년에는 이러한 정의를 열망하는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넷플릭스가 만든 ‘언빌리버블’(Unbelievable)과 ‘그들이 우리를 볼 때’(When They See Us)가 특히 그런 작품이었다) ‘져스트 머시’, ‘다크 워터스’, 그리고 ‘히든 라이프’는 우리 삶에서 특히나 중요하고 유익한 정의를 추구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도 두드러진다. 정의는 인내가 필요하다정의를 추구하는 데에는 인내와 집중력이 필요하다. 정의는 쉽게 달성되는 것이 아니며 종종 오랜 그릿(GRIT) - 성장(Growth), 회복력(Resilience), 내재적 동기(Intrinsic Motivation), 끈기(Tenacity)의 줄임말로 성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투지를 의미한다 - 이 필요하다. 하루 종일 트위터에 글을 쓴다고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다. 십 년에 걸친 집중적이고 체계적인 행동만이 정의를 가져올 수 있다. ‘쇼트 텀 12’(Short Term 12)를 감독한 데스틴 다니엘 크레튼(Destin Daniel Cretton)이 메카폰을 잡은 ‘져스트 머시’는 제이미 팍스(Jamie Foxx)가 연기한 월터 맥밀란(Walter McMillian)의 실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월터 맥밀란은 흑인으로 알라바마주에서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살인죄를 쓰고 억울하게 사형을 당했다. 마이클 조던(Michael B. Jordan)이 연기한 젊은 변호사 브라이언 스티븐슨(Bryan Stevenson)이 맥밀란의 변호를 맡았다. 이 영화는 맥밀란 외에도 억울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여러 죄수를 석방하기 위해서 애를 쓴 자전적 이야기를 담았다. 이는 스티븐슨이 2015년에 발간한 그의 책을 원작으로 한다. ‘져스트 머시’는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수년간의 삶을 감옥에서 보낸 무고한 사람들의 극심한 고통을 강렬한 영상으로 표현했다. 무고하게 유죄를 받은 이들의 싸움이 중요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들의 삶에 남아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다.‘원더스트럭’(Wonderstruck)을 감독한 토드 헤이네스(Todd Haynes)가 메가폰을 잡은 ‘다크 워터스’는 정의를 추구하는 오랜 과정을 아주 잘 포착한 영화이다. 2016년 뉴욕타임즈 잡지에 실린 기사를 근거로 한 이 영화는 오하이오주 변호사, 마크 루팔로(Mark Ruffalo)가 연기한 롭 빌로트(Rob Bilott)의 이야기이다. 롭 빌로트는 공개적으로 유해 화학물질을 웨스트버지니아의 파커스버그(Parkersburg) 상수원에 버린 듀퐁(DuPont)과 무려 이십 년에 걸친 법정 분쟁을 벌인 인물이다. 독성에 오염된 물은 그 지역 주민들에게 암, 선천적 기형아, 그 외에도 수많은 병의 원인이 되었다. 두 시간 동안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나이 먹어가는 이십 년의 시간을 관객들이 훑어보도록 만든다. 특히 길고도 힘든 싸움을 벌임으로 자신의 건강까지도 잃게 된 빌로트가 늙어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언젠가 내가 이야기한 적이 있는 테런스 맬릭(Terrence Malick)이 감독한 ‘히든 라이프’도 정의를 위해 홀로 싸운 한 남자,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정권에 맞서서 싸운 오스트리아 농부, 프랜츠 에거슈테터(Franz Jägerstätter)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예거슈테터를 다룬 것은 ‘60분’(60 Minutes)과 같은 다큐멘터리나 잡지 기사도 없다. 그는 평생 추구하던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의 이야기는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며 때로는 살아서 볼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제목이 상징하는 것처럼,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정의는 주인공이 살아있는(life) 동안에는 숨겨진(hidden) 그 무엇이다. 희망은 미뤄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불의가 승리하는 것 같다.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이건 실로 힘든 현실이다. 종종 정의는 이 세상에서는 만날 수 없는 것이다.정의는 외로운 싸움이다이 세 편의 영화는 정의를 추구하는 외로운 과정을 담고 있다. 각각의 영화에서 주인공은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이다. 승리할 가능성은 희박하고, 싸움의 대가는 혹독하기에 정의를 추구하는 자의 정신 상태가 오히려 의심을 받을 정도이다. 반대자, 비판자, 그리고 적은 사방에 널려있다. 내 편은 거의 없다.‘져스트 머시’에서 스티븐슨은 뼛속까지 인종 차별로 가득한 전체 시스템과 싸우는 한 명의 변호사이다. ‘다크 워터스’에서 빌롯은 세계에서 가장 큰 회사 중 하나와 싸우고 있다. ‘히든 라이프’에서 에거슈테터는 그의 확신을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는 나라 전체(그리고 교회 기관)와 싸우는 초라한 농부이다. 이들은 싸우는 동안 하나둘 친구를 잃고 또 명성까지 잃어간다. 주인공과 가까운 사람들조차 그들의 싸움이 가치가 있는 건지 의심할 정도이다. 싸움의 과정에서 이들은 하나같이 내적으로 절망의 시간을 만난다. 어쩌면 냉소하는 자들이 맞는지도 모른다.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싸움인지도 모른다. ‘다크 워터스’에서 빌레트는 앤 해써웨이(Anne Hathaway)가 연기한 그의 부인에게 한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어떤 시스템도, 그게 회사이든 정부이든, 또는 규제 기관이든 우리의 유익에 관심이 있는 곳은 없다고 한탄한다. “시스템 자체가 조작되었어.”라고 빌레트가 말한다. “그들은 자기네가 우리를 보호해준다고 생각하길 원해. 그러나 우리를 보호하는 건 우리 자신이야. 우리 자신뿐이라고!” 이건 너무도 슬픈 현실이고 또 너무 냉소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타락한 세상은 실로 냉담하기 이를 데 없다. 바른 일을 한다고 반드시 보상이 따라오는 세상이 아니다. 그렇기에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그건 이익도 또 인기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이익이 되기보다는 치러야 할 대가가 크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건(이 타락한 육체가 추구하는 논리와는 반대되게도), 정의의 추구가 결코 당신 자신을 높아지게 하거나, 실제적인 유익을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종차별주의에 반대하는 싸움이든, 기업의 불신, 무모한 오염, 대량 학살, 낙태, 성매매, 또는 다른 각종 악에 대항하는 싸움이든지 관계없이,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우선순위에 두는 일이다. 약한 자들을 옹호하고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정의는 사랑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정의는 사랑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을 사랑하는 일보다 더 높은 진실성을 추구한다. 다른 이들을 섬기고, 심지어 그들을 위해서 죽기까지 하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행동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있는 고귀함을 알기 때문에 정의를 추구한다. 양심으로부터 들리는 소리, 또는 그리스도로의 부르시는 소리, 정의를 추구하라는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결코 거만하고 허영심 가득한 마음 때문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이다. 물론 분노도 포함된다. 각각의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분노의 순간을 만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큰 대가를 치르고 외로운 전쟁을 수행하는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악당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연약한 자들을 향한 사랑이다. 스티븐슨은 제이미 팍스가 연기한 맥밀란의 지치고 힘겨운 얼굴을 보며 그를 사랑하게 된다. 이 사랑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빌레트도 이와 비슷하게 사랑으로 인해 동기부여를 받는다. 그건 듀퐁의 화학물질 때문에 병에 걸리고 죽어가는 사람, 성실하게 일하는 지역 주민들을 향한 사랑이다. 에거슈테터는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향한 사랑, 그리고 민족주의에 오염된 교회, 또한 파시즘이 퍼지면서 피해를 받은 무고한 희생자들을 향한 사랑 때문에 나치에 대항해서 용감하게 일어났다. 인터넷이 불러일으키는 분노가 차고 넘치는 오늘날,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성격 급한 복수심 때문이 아니라 꾸준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낙태를 막기 위한 지속적인 투쟁도 자유주의자를 물리치려는 마음이 아니라 태어나지 않은 태아의 생명을 구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환경 운동도 오염을 일으키는 자들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오염 때문에 피해를 받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중심에 있어야 한다. 정의를 해시태그 다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착각이다오늘날 금세 증발하는 가연성(combustible) 소셜 미디어 환경에서 “정의”는 비극적일 정도로 추상적이고 정치화되어버린 단어이다. 정의는 단지 이쪽 아니면 저쪽을 선택해야 하는 어느 한쪽만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기독교인에게는 특히 중요하다. 정의는 성경이 다루는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정의를 단지 해시태그 다는 것, 또는 “탈진실”(woke: 최근 옥스포드 사전에 등재된 신조어) 전쟁에 참가하는 빨치산 병사가 되는 것으로 축소할 때, 우리는 인간의 현실을 놓치게 된다. 영화와 TV 시리즈를 통해서 우리는 진짜 얼굴, 진짜 고통과 불의를 만날 수 있다. 정의를 추구하여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우리의 영혼은 다시 한번 깨어날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나는 기독교인과 교회가 지금 소개하는 이 세 영화를 꼭 보기를 보았으면 한다. 그리고 ‘원 차일드 네이션’(One Child Nation), 또는 ‘사마’(For Sama)와 같은 다큐멘터리도 꼭 보기를 바란다. ‘하얀 거짓말’(White Lies)과 같은 팟캐스트도 들어야 한다. 이런 매체들을 통해 인간의 고통과 불의에 대해 우리의 마음이 열릴 수만 있다면, 여기에 쏟는 시간은 충분히 그 가치가 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Oscar Ignored These 2019 Films. Christians Shouldn’t.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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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
다양한 인종의 창조를 어떻게 가르칠까?
by Shai Linne
2020-02-06
인종의 다양성은 어렵게 수용해야 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5장 9절에서 10절을 보면,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 구속된 여러 인종의 사람들이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이 잘 드러난다. 보석의 여러 단면처럼, 하나님의 영광은 복음의 빛이 여러 다양한 그릇을 통해 반사될 때 더 밝게 빛난다. 인종 차별주의, 편견, 민족적 자존심의 죄는 과거에 있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다양한 문화 속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주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손을 뻗었을 때, 특정한 민족을 염두에 둔 게 아니라 민족 전체(people groups)를 생각하고 있었다(계 7:9). 하나님의 아들은 너무나 영광스럽기 때문에 열방들이 그의 선택을 받아 그를 예배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참여할 특권이 있다. 우리는 또한 자녀들에게 이 왕국의 관점을 가르칠 책임이 있다. 세상 문화에 역행하는 성경적 관점은 그냥 생기지 않는다. 가르쳐야 한다. 자녀들이 다양한 인종을 창조한 하나님을 깨닫도록 하는 여섯 가지 방법이 있다.1. 성경이 인종의 다양성을 어떻게 말하는지 가르쳐라다양한 인종을 설계하신 하나님에 관해서 성경은 침묵하지 않는다. 복음에 내재 된 진리는 전 세계 모든 민족 집단의 사람들과 화해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여러 가지 빛깔을 가진 아름다운 신부이다. 아이들에게 이러한 진실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다양한 인종이 있는 미래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구절이 요한계시록 5장 9절이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각 족속방언백성나라(그리스어로 ethnos)하나님의 목적은 분명하다. 다양한 민족이 그의 영광을 찬양하도록 구원받는 것이다. 우리는 이 비전을 자녀에게 가르쳐야 한다.그리고 우리는 다민족 예배의 목표가 천국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해야 한다. 다음은 이 진리를 이야기하는데 도움이 되는 몇 개의 구절이다. 성령이 어떻게 모든 지파와 나라에서 사람들을 이끌어 하나님을 경배하는지에 대해 자녀와 이야기 할 때 이 구절들을 사용하라. 창 17:4; 민 12:1-8; 시 22:27-28; 72:11; 단 7:14; 요 4:9; 행 10:34-35; 13:47; 롬 15:8-12; 갈 3:28; 엡 2:13-16; 약 2:8-9; 계 7:9.2. 성경과 인종의 흔한 오류를 바로잡으라서양의 문학과 영화 속에서는 예수님을 포함한 성경 인물이 백인으로 그려지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묘사는 백인만 정상이고 백인이 아닌 인종은 “그 외”라는 개념을 심어준다. 특정 민족을 하나님이 편애한다는 오해를 할 때 영적으로 크게 문제가 된다. 부모는 백인 예수가 나오는 삽화가 중동 사람들을 정확하게 묘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주어야 한다. 이러한 오류를 수정하면 더 많은 대화가 가능해진다. 3. 다른 나라의 문화를 공부하라나는 특히 백인 독자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많은 백인, 특히 미국에서는 많은 사람이 유색 인종과 어떠한 관계를 맺지 않고도 얼마든지 평생을 보낼 수 있다. 또한 학교 교과 과정이 서구 문명과 업적에만 초점을 맞추고 "백인 세상"이 당연하다는 개념은 너무 일반적이다. 유색인을 언급할 때 종종 노예 제도와 피지배자로 묘사한다. 다른 문화를 더 잘 이해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다행인 것은 정보 검색 시대에 인터넷 검색 후 몇 초 안에 많은 양의 리소스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4. 다른 인종과 관계를 맺기 위한 기회를 만들라다양성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추구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장벽 중 하나는 다양한 인종과 접촉할 수 있는 근접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거주 지역에 따라 이러한 관계를 발전시키려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지역 교회는 이런 추구를 위한 이상적인 장소이다. 불행하게도 옛날에는 “일요일 오전 11시는 인종을 가장 분리시키는 시간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 다양한 인종이 있다면, 그들과 함께 저녁 식사/ 가족 외출/ 각종 활동을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상호 교류가 자녀에게 자연스러운 일이 되도록 해야 한다. 교회 밖에서 이런 노력은 다양한 어린이들과 우정을 쌓을 수 있는 과외 활동에 자녀를 등록시키는 것이 있다. 스포츠 클럽, 합창단 및 여름 캠프는 그러한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이런 활동을 기획하기 위해서 때때로 좀 더 창의적이어야 하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5. 편견의 언어와 행동에 맞서라인종에 편견을 가진 부모는 그런 사고방식을 고스란히 자녀에게 전파하기 마련이다. 종종 부모가 아닌 인종에 둔감한 다른 가족 일원의 입에서 나온 인종 차별적인 말이 자녀에게 전파되는 경우도 있다. 거기에 대해서 부모가 아무 대응을 하지 않는다면? 게다가 그런 편견을 주는 건 꼭 가족만이 아닐 수 있다. 텔레비전이 될 수도 있다.어떤 경우이든, 그런 상황이야말로 부모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이 농담은 재미있지 않아,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으므로 다른 사람들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해서는 안돼.” 또는 “내가 밥 삼촌을 사랑하지만, 아까 저녁 식사 때 다른 인종에 대해서 삼촌이 말한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거야. 그런 말은 죄야. 우리는 민족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받아들여야 해.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방식이기 때문이야.”이런 단호한 행동은 가족 간에 분열을 일으킬 위험이 있기에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관계의 희생이 따르더라고 자녀가 모든 인종을 사랑하는 하나님을 바로 알도록 하는 행동이다. 아이들은 이런 부모의 말과 행동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는다.6. 성령이 모든 민족의 벽을 허물 그 날을 기대하라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증거 하는 당신의 말, 태도, 그리고 행동을 통해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그에게로 부르신다. 또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그들 모두를 하나로 만드실 거라는 사실을 자녀들이 알도록 하라(요 17:20-26). 그렇다.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조력자, 그리고 우리의 힘이다.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할 수 있고 또 하실 것이다.요한복음 17장을 가지고 자녀와 함께 기도한 다음, 가족이 교회, 학교 및 이웃에서 예수님의 이 기도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 이야기하자.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6 Ways to Show Your Child God’s Design for Ethnic Diversity번역: 무제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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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의다양성
성경
관계
편견
성령
죽었으나 사라지지 않은 포스트모더니즘
by Collin Hansen
2020-01-09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에 사망 기사가 나지도 않았다. 조의를 표하는 어떤 소식도 TV 뉴스에 보도되지 않았다. 분명 포스트모더니즘이 죽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 죽음을 예견한 이들도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막지는 못했다. 사망의 조짐은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의 DNA를 통해 나타난 바가 있었다.당신이 교회의 목회자라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사망 소식을 놓쳤을지 모른다. 물론 수많은 언론인과 문화 평론가 또는 미래학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이야말로 이 시대에 크게 성공할 상품인 양 선전해 왔다. 누구도 멈출 수 없는 흐름이라고 예견해 왔다. 그들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공격을 지난 2천 년 동안 교회가 견뎌 왔다는 사실은 알지도 못한 채, 포스트모더니즘에 적응하지 못하면 곧 죽을 수밖에 없다고 말해 왔다. 그러나 2011년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장례식이 열렸다. 런던에 있는 빅토리아와 앨버트 박물관(Victoria and Albert Museum)에서 “포스트모더니즘 그 양식과 전복의 역사, 1970-1990년”(Postmodernism: Style and Subversion 1970-1990)이라는 제목의 전시회가 개최되었다.판단 기준의 부재흔히 기독교인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마치 철학과 윤리 분야에서 일어난 하나의 혁명적인 사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앞선 모더니즘이 신뢰한 확실성에 반발하기 위해 전방위적으로 일어나게 된 일종의 대안 정신으로서 처음부터 흔들리는 기반 위에 세워져 있었다. 그렇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은 언제나 선택적으로만 각 분야에 적용되어 왔다. 그러면서 모더니즘을 초월한 형태로 자주 표현될 뿐 그 스스로가 완전히 새로운 사조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한 마디로, 포스트모더니즘은 앞서 등장한 모더니즘과의 관계 속에서만 설명될 수 있었다. 예술과 문학에 뿌리내린 포스트모던 학파 역시 모더니즘 관습에 대한 산발적인 항변을 나타낼 뿐이었다. 런던 전시회의 주최 측은 이렇게 설명했다.“과거 모더니즘은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는 창문과 같았다. 이와 달리 포스트모더니즘은 깨진 거울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균열이 생긴 여러 조각의 유리 표면과 같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적인 지침은 복잡성과 자기모순에 있다. 권위에 저항하기 위해 형성된 포스트모더니즘은 1970년대에서 90년에 이르는 이십여 년 동안 그 스스로가 애초에 해체하고자 했던 돈과 권력의 문제에 빠지고 말았다.”여기서 우리는 수많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포스트모더니즘을 주목하게 만들었던 몇 가지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어떤 일이 과거와 현재, 미래에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거대담론에 대해 회의감을 표출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를테면 마르크시즘과 같은 근대 사조와 달리, 이제 우리는 인간의 동기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모순과 역설을 받아들이며 사는 법을 익히게 되었다.이 모든 현상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어느 한순간에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이 묘사된다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포스트모던 세대는 병원을 방문할 때나 정의를 부르짖을 때는 이상하게도 모던 세대와 비슷한 소리를 낸다. 실제로 가족 간에는 서로 닮은 점이 있게 마련인데, 모더니즘과 그 방탕한 아들 사이에도 그러한 것이다. 그 아들은 돈과 권력에 탐욕을 낸 아버지처럼 크지 않으리라고 다짐했지만, 세월이 흘러 거울을 보고는 그 빼닮은 모습에 놀라 뒷걸음을 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저널리스트로 활동하는 에드워즈 독스(Edwards Docx)는 ‘프로스펙트’(Prospect) 매거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몰락하며 소비주의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고 강한 어조로 지적했다. 그 아티클에서 그는 저자의 의도에 대한 반발로 문학에서 일어난 포스트모던 경향을 설명했는데, 이를테면 페미니스트나 동성애자와 같은 사회적 소수자의 발언에 문을 열며 일부 계층에 자유를 허락한다는 명목하에 시작된 움직임이 결국에는 반지성적인 무질서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고 비판했다.“공산주의가 붕괴되며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하게 된 서구 자본주의는 잠시 동안 포스트모더니즘의 아이러니한 전술로 인해 도전에 직면하는 듯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새로운 상황이 발생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원체 모든 것을 비판하기 때문에, 혼란과 불확실성의 기류도 함께 자라며 번성하다가 근래에 들어서는 여러 곳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래서 문학의 신조와 기술 또는 미학에 대한 확신도 결핍되었다. 이런 분위기는 문화 전반으로 확산되어 누구도 스스로 안심하거나, 무언가 이룰 수 있는 능력이나 기술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모든 것을 부정하는 분위기 속에서 어떤 대상의 진위를 가리거나 판별할 수 있는 방도가 정책적으로 마련되지도 않았다. 아무런 미학적 기준이 없다 보니, 작품의 가치는 그 작품이 가져다주는 수익에 따라서 평가하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다.”이 분석을 통해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낳은 역설적인 결과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된다. 그 한 예로 ‘다빈치 코드’(The DaVinci Code)를 쓴 댄 브라운(Dan Brown)을 들 수 있다. 그는 학회에서 자신에게 동조하는 일부 사람들의 도움으로 마치 학자처럼 행세하며 진리를 오용함으로써 그릇된 돈벌이를 하게 되었다. 그는 승자가 역사를 기록한다는 전제를 깔고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는데, 이런 전제는 포스트모던 사고를 그대로 반영한다. 또 그는 신뢰할 만한 학계의 표준적인 견해는 무시한 채, 이단적인 사설을 마치 교회의 정통적인 입장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정보처럼 끌어올려 작품을 전개해 나갔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저급한 추리 소설을 대중 시장에 내놓았고, 많은 사람이 진정한 역사를 잘 알지 못하는 상황을 이용하여 엄청난 돈을 긁어모으게 된 것이다.어찌 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죽음은 당연하다. 시장은 상품의 질을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상태에 언제든 빠질 수 있다. 문제는 에드워즈 독스가 지적한 대로, 현재의 탈포스트모던 세대(post-postmoderns)가 어디에서 탈출구를 찾아야 할지를 모른다는 데 있다.“우리는 우리 자신의 과도한 소비 행태와 거짓을 진짜처럼 둔갑시키는 시장, 그리고 각종 소셜 미디어를 채우는 온갖 잡다한 이야기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한다. [중략] 포스트모던 세대는 모던 세대가 그들에게 무엇을 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태도를 문제 삼았다면, 현세대가 느끼는 문제는 그와 정반대이다. 즉 누구도 그들에게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이다.”따라서 교회의 목회자가 시대에 적응한다는 명목하에 쓸데없는 시도를 하며 적실성만 추구한다면, 현세대에게 정작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는 지경에 처할지도 모른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끝났다. 그 다음에 어떤 사조가 몰려올지 우리는 모른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이 죽었을지 몰라도, 그 기류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판단 기준의 실재깨어 있는 목회자라면, 지난 수십 년간 시대정신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실감할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게 그 이전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질 필요는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남긴 이점도 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인식론적 불확실성이 우리의 죄악 된 확신 내지는 교만을 점검하는 데 유용한 기능을 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에 내포된 지혜를 반영하기도 한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덕분에, 더 이상 계시와 분리된 이성만으로 인간의 모든 지식을 축적할 수 있다는 식의 계몽주의 사상은 내세울 수 없게 되었다.문제가 있다면, 모든 것을 알고자 했던 인간의 탐구가 결국에는 무엇인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의문만을 남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팀 켈러(Tim Keller)는 에드워즈 독스의 아티클에 관해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최근에 나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계속 들어 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가 속한 문화와 역사에 따라 우리 자신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인정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또한 진리를 주장하는 일이 얼마나 쉽게 권력 싸움으로 변질될 수 있는지도 보여 주었다.’ 하지만 그런 포스트모더니즘이 결국에는 스스로를 해치고 말았다. 거기에는 진리와 정의와 권위에 대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기준이 없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어디에서 그 기준을 찾아야 할지를 알려 준다. 교회 안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성경이 어떻게 부정적인 사례를 들어 그와 같은 문화적 흐름에 대응하도록 가르치는지를 놓칠 때가 있다. 두 가지 경우만 생각해 보겠다. 먼저 본디오 빌라도는 서로 반대되는 주장을 들으며 진리가 과연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그는 진리이신 그분 앞에 서 있으면서도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요 18:38).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듣는 귀를 주셔야만 진리를 증언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요 18:37).다음으로 솔로몬은 돈과 권력을 다 거머쥐고 쾌락을 마음대로 누렸으면서도 인생에 절망감을 느꼈다. 그는 전형적인 포스트모던 시대의 다원론자처럼 외부로부터 새로운 신들을 다 받아들였다(왕상 11:1-8).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쓸모없게 느껴졌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11). 이는 마치 에드워즈 독스의 탄식과 같이 들린다. 전도서는 그 결론부에서 신뢰할 만한 정의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문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14).우리가 속한 문화적 상황은 변할지 몰라도, 인간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비록 죽었지만, 그 정신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보편적 절망감을 반영하는 한, 여전히 우리 곁에 그 영향이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럴 때일수록 그분만이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진리와 정의, 권위의 근원이 되심을 기억해야 한다.교회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대체하게 될 정신이 무엇인지를 반드시 알아야겠지만, 그 정체가 무엇이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모든 문화와 시대를 초월하는 좋은 소식을 선포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 진리는 공허한 주장을 내세우지 않으며,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바로 그분께 속한 권위 외에는 다른 권력을 손에 넣으려 하지도 않는다.결국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신 그분의 음성만이 거룩한 공의가 실현된 아름다운 역설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 ‘죽음’으로써 수많은 죄인을 위한 영원한 ‘생명’이 되었기 때문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Postmodernism: Dead But Not Gone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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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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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뉴스를 대하는 법
by Paul Conner
2019-11-28
“왜 읽을거리가 많은데, 굳이 신문 기사를 읽는가?”C. S. 루이스는 ‘문학 비평의 실험’(An Experiment in Criticism)과 ‘예기치 못한 기쁨’(Surprised by Joy)에서 이러한 물음을 던졌다. 그는 오로지 신문만 읽는 사람을 “가장 비문학적인 독자”라고 표현했다. 이는 “제일 하찮은 소설”을 읽는 독자보다도 수준이 낮은 독자를 의미했다. 또한 루이스는 신문 기자에 대해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왜냐하면 거의 “상스럽고 선정적인” 이야기에만 매달려 글을 쓸 뿐 어떤 사실도 원래의 맥락에서 다루려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우리는 루이스의 이런 지적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물론 나는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뉴스를 아예 끊어 버리기를 바라진 않는다. 그러나 루이스의 지적처럼, 우리가 어떤 자세로 뉴스를 대해야 할지는 한 번쯤 고민해 봐야 한다.그래서 이 글에서는 언론 매체를 대할 때 크리스천으로서 지녀야 할 성경적 원리를 다섯 가지만 소개해 보도록 하겠다.1. 진위를 분별하라“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자기의 행동을 삼가느니라”(잠 14:15).먼저 우리가 읽고 있는 기사에 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과연 그 내용이 인간의 상태를 바르게 묘사하고 있는지,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드러내고 있는지, 현실에 대해 균형 잡힌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사실 누구나 객관성을 강조하지만, 어느 기자도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따라서 시간이 허락된다면, 여러 각도로 생각하며 신문 기사를 읽는 게 현명하다. 혹 뉴스의 목표가 진실을 밝히는 데 있다고 하더라도, 언론인은 항상 진실만을 발표하지 않는다. 이는 그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든지 진실은 언제나 가려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그러므로 늘 분별하라. 뉴스 속보조차 잘못된 내용일 때가 많다. 그러니 신문 기사를 읽고 공개적으로 반응하기 전에, 시간을 두고 어떻게 루머와 추측이 서서히 걸러지는지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2. 어리석은 내용을 피하라“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하느니라”(잠 18:2).쓸데없고 어리석은 이야기가 소셜 미디어나 케이블 방송 뉴스를 비롯한 각종 매체에 넘쳐 난다. 그중 소셜 미디어는 간결한 문구로 소식을 전달하는 문화를 확산시키고 있는데, 이는 짤막한 의견을 피력하고 그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펴보는 데 안성맞춤인 수단이 되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복잡한 사안에 관해 미묘한 대화가 오가며 끔찍한 결과를 낳는 공개 토론의 장이 되기도 한다.케이블 방송에서 소개하는 뉴스는 진솔하고 유익한 논의를 도모하기보다 다툼을 조장하는 기사를 다룰 때가 더 많다. 그 내용은 흔히 시청자가 생각하는 수준보다 더 심하게 각색되기도 한다. 피디는 게스트가 방송에 나오기 전에 해야 할 말을 미리 정해 주기도 하고, 특정한 주장을 펼치기 위해 일부러 그에 맞는 사람을 초청하기도 한다. 당연히 사려 깊은 토론보다는, 언성을 높이며 서로 격렬하게 논쟁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 준다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3. 공감하려고 노력하라“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앞선 부정적인 측면과 달리, 각종 뉴스는 다른 민족이나 연령 또는 경제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삶이 어떠한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한다. 그러한 이해는 무엇보다도 서로의 고통과 슬픔을 감당하며 진정한 연합을 이루어야 할 교회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나는 미국 사회에서 흑인으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경험인지 잘 몰랐다. 그러다가 과거뿐 아니라 현재까지 지속되는 흑인 차별에 관한 기사를 읽으며 교회에 있는 지체들의 경험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기사를 읽기만 한다고 해서 관계가 저절로 좋아지지는 않겠지만, 그와 같은 이해는 타인과 깊은 관계를 가지는 데 큰 도움을 준다.4. 걱정에 사로잡히지 마라“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뉴스를 통해 사회가 당면한 문제만 계속 접하면 불안에 휩싸이기 쉽다. 그런 순간에는 우리의 요새가 되시는 하나님이 주권을 행사하고 계신다는 진리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우리의 지도자를 세우시고, 세상의 불의를 미워하시며, 언제나 우리에게 선이 되도록 만사를 주장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즉 최악의 사태가 일어나더라도 우리의 구원은 변치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이와 같은 진리는 세상의 소문이 흉흉할 때에 더욱 빛을 발하는 법이다.5. 구체적으로 기도하라“기도에 항상 힘쓰며”(롬 12:12).언론 매체가 전달하는 소식은 지역 사회와 세계를 위해 구체적인 지식을 가지고 기도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뉴스 때문에 생긴 걱정을 떨쳐 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기사를 접한 후 하나님께 마음을 토로하는 것이다.만일 당신이 섬기는 교회가 어느 지역의 선교 사역을 후원하고 있다면, 당연히 그 지역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보며 선교 사역을 위해 더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물론 당신이 속한 도시에 대해서도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우리에게 전달된 최고의 뉴스나는 언론 매체에 대해 C. S. 루이스만큼이나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진 않다. 각종 미디어는, 이를테면 아내와 어디에 가서 데이트를 하면 좋을지 또 누구에게 투표를 하면 좋을지를 알려 주기도 하고, 기도해야 할 구체적인 제목이 무엇인지를 상기시켜 주기도 한다. 혹은 이웃과 만났을 때 대화의 소재가 된다거나 내가 종사하는 분야의 최근 소식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세상에 관한 다양한 지식을 제공함으로써 타인의 입장을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아니면 단순히 기분 전환을 위해 읽힐 수도 있다. 그러므로 보도 내용을 작성하는 기자나 언론인이 진실을 추구하고, 윤리적으로 행동하며, 흥미롭고 유익한 이야기를 제공한다면, 그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마땅하다.그러나 우리는 미디어의 한계를 또한 인식해야 한다. 여러 언론 매체는 인간의 타락상을 드러내는 데는 훌륭하게 기능하지만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는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다시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성경은 인간의 타락에 대해 사망과 지옥이라는 형벌이 따른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그 형벌이 거두어지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 그분을 믿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주어진다고 가르친다. 이 소식이 바로 우리에게 전달된 최고의 뉴스이다.그러므로 진짜 현실을 규정하는 뉴스는 미디어가 전달해 주지 못한다. 얼마나 당혹스러운 헤드라인을 접하게 되었든 간에, 오늘도 보좌에서 다스리시는 분은 우리의 왕이시다. 이에 우리는 소망한다. 머지않아 그분이 오셔서 어리석은 자의 입을 잠잠케 하시고, 두려움을 조장하는 이슈도 다 제거하시며, 진정으로 새로운 기사를 우리 모두에게 들려주시기를 말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5 Ways to Engage with News Media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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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믿음이란 무엇인가?
by Joe Carter
2019-11-14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올바른 임무는 생각과 말의 본질을 분명히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철학의 문제들은 환상에 지나지 않으며, 언어에 대한 오해로 발생한다고 믿었다. 나는 그가 꽤나 실정을 과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중요한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철학뿐 아니라 종교와 같은 다른 분야에서도 많은 문제들은 언어의 부정확한 사용이 원인이 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무엇이 ‘종교적 믿음’을 구성하는가에 대한 논쟁이다.하나의 신념을 종교적 믿음으로 정확히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 결정하기 위해 우선 우리는 모든 종교적 믿음과 종교적 믿음에만 해당되는 사실들을 모두 나열함으로써, 너무 넓거나 좁지 않은 방식으로 용어를 정의해야만 한다. 이것이 명확한 의미로 나타날지도 모르는 반면, 의미 정의에서 필수적인 구성 요소가 제거되었을 때 무엇이 제거되었는지를 발견하게 되어 종종 놀라기도 한다. 예를 들어 모든 나무에 해당하는 사실이지만 나무에만 사실인 것을 제한된 방식을 통해 나무의 개념으로 정의하려 한다고 상상해 보라. 어떤 방식으로 설명을 점차 축소시키는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모호하고 만족스럽지 않은 정의를 가져다줄지도 모른다.나무의 단어를 정의하는 방식은 종교적 믿음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우리는 특정한 종교적 신념의 특징들인 나뭇잎과 덤불을 잘라 버린 후 남겨진 헐벗고 빈약한 갈대에 감명받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또한 최소한의 정확한 정의가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다른 것들이 실제로 더 종교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하는 반면, 우리가 종교적이라고 생각했던 어떤 믿음들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폭로하게 될 것임을 예상해야 한다. 비록 놀라고, 만족스럽지 않고, 인상적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점은 우리가 용어를 바르게 정의해야 한다는 것이다.종교적 믿음에 필수적이라고 흔히 믿게 되는 두 가지 특징을 살펴보자.종교적 신념은 신에 대한 믿음을 필요로 한다종교적 믿음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 중 하나는 신 혹은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특징은 초월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다신교를 배제시키기 때문에 너무 제한적일 것이다. 사실상, 일부 종교, 예를 들어 힌두교, 소승 불교 등은 그야말로 무신론을 따르기 때문에 신의 개념을 전혀 포함할 수 없다.종교적 믿음은 예배 혹은 예배 관련 활동들을 유도하는 믿음이다이 특징 또한 예배 행위를 하지 않는 힌두교와 소승 불교의 반증에 의해 일축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인들과 신들은 사람을 알지도 돌보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던 쾌락주의자들의 종교적인 신념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런 무관심한 존재들을 숭배할 의무가 전혀 없다고 느꼈다.의미 정의에서 신과 예배를 제외한다면 공통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종교적 신념은 거의 없다. 철학자 로이 클로저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성서적 하나님의 개념, 브라만-아트만에서 힌두의 개념, 소승 불교에서 법신의 개념, 도교에서 도의 개념을 통해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요소는 무엇인가?” 모든 종교적 전통은 어떤 것 또는 다른 것을 신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그들 모두는 신성 그 자체의 지위에서 공통분모를 가진다고 답한다.많은 종교들은 무엇이 신적인 것이냐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들 모두는 신적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는 동의한다. 신적인 것은 무엇이든 절대적이고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실체, 즉 무엇이든 바로 그곳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신적이지 않은 모든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라도 궁극적으로 신적인 무언가에 존재를 의존한다. 비의존성과 그에 상응하는 개념은 모든 종교적 믿음의 공통적 특징이다.클로저는 공통된 요소들을 사용하여 정확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공식화한다. (1) 어떤 것을 신적인 것으로 여기는 믿음, (2) 신적인 존재와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에 관한 믿음, (3) 어떤 것을 무조건적으로 비의존적인 존재, 즉 신적인 존재로 믿는 믿음.우리가 이 정의에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모두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종교적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이야기해 오던 우리의 전 생애를 산문에서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사투리로 말하지만 그들 스스로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모두가 종교적 믿음의 체계와 행위,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종교적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터무니없을 수도 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실수로 종교의 반대라고 믿는 이론이나 신념, 즉 물질주의 등에 중점을 둠으로써 나타날 수 있다.물질주의(유물론)라는 개념은 적어도 고대 그리스인 이후로 존재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비종교적인 개념으로 간주되고 있다. 물질, 또는 다른 물리적 실체가 무조건적이고 비의존적인 실재이며, 믿음에 기반하여 자연과 인간에 대한 결론을 이끌어 낸다는 명백한 주장은 다소 이상하다.사실상 유물론은 무신론과 같은 일부 관련된 믿음보다 정의에 더 가깝다. 마치 유일신교가 신의 수를 하나라고 또 다신교는 그 수를 하나 이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무신론은 많은 신은 제로라고 주장한다. 단순히 종교적 신념의 비본질적인 요소에 대한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무신론이 본질적으로 종교적 신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반면에 유물론자는 범주적이고 명확한 방식으로 정의하기에 적합하다.클로저의 정의는 너무 광범위하거나 좁지 않다. 이는 알려진 모든 종교적 전통에 적용 가능하며 논리적으로도 강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물질주의자들은 그들의 논리를 굽혀 지나친 종교적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이 점을 강조하면, 많은 물질주의자들은 ‘종교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의미론에 있어서 특별한 간청을 하거나 언쟁을 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클로저가 말했듯이, “만약 당신이 신적인 것이라고 믿는 어떤 것이든 당신에게 종교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면, 그런 믿음을 가지고 종교적 특징을 인정하는 우리에게는 당신의 믿음은 자의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종교적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걸 인정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신이 원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부르라는 사고는 틀림없이 종교적 믿음처럼 보이고 기능할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at is a Religious Belief?번역: 송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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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축과 투자에 대한 성경적 원리
by Chris Cagle
2019-10-17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은퇴나 장애를 대비하여 저축과 투자를 해야 함을 알고 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돈을 관리하는 일에 신학을 적용하기 어려워한다. 특히 멀리 있고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여 저축하고 투자하는 일과 관련하여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 주제에 관하여는 기독교 안에서도 너무 많은 관점들이 있기 때문에 크리스천들이 이를 실제 삶에 적용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어떤 관점은 사치스러운 삶을 부인하며 천국을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관점은 생의 후기에 더 큰 부를 누리고 쓰기 위하여 예산을 세우고, 빚을 지지 말며, 정기적으로 저축하라고 제안한다. 좀 더 극적인 관점 안에서는, 40세 이전에 은퇴할 수 있도록 극도로 절약하고 저축을 강조하는 재정 독립과 조기 은퇴(FIRE, Financial Independence/Retire Early)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이와 같이 다양한 관점들이 서로 모순되고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더욱 어려움이 있다.그러면 미래를 위해 실제로 저축하고 투자하는 면에서 성경적 정통 신학과 균형을 이루는 개인적 차원의 돈의 신학을 어떻게 세울 수 있을까? 이를 위해 7가지 성경적 원리를 나누고자 한다.1. 미래를 대비하여 저축하는 일은 성경적이다어떤 크리스천들은 은퇴를 대비하여 저축하는 일을 (보통 마태복음 6장 19-20절을 인용하면서) 불순종이라고 믿거나,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보다 다른 곳에 돈을 두는 일에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에 저축하지 않는다. 다른 이들은 하나님이 은퇴 후의 삶도 돌보실 것이므로(사 46:4) 나중을 위한 저축은 필요치 않다고 믿는다. 그리고 저축하고는 싶지만 벌어들인 돈을 모두 다 써 버리기 때문에 저축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잠 13:18). 놀라겠지만, 성경은 실제로 저축을 장려하고 있다. 성경은 미래에 발생할 필요가 알려지고 예상되는 경우 저축하는 일을 용납한다(창 41; 잠 6:6–11; 21:5, 20).성경은 미래를 대비하여 지혜롭게 저축하고 투자하면서도 “보화를 하늘에 쌓아 두는 일”로 “하나님께 부요[해]지는”(눅 12:21; 마 6:19-21) 일이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2. 저축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이다저축하는 일은 순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한 활동으로 여겨지기 쉽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하지만 저축을 하면서도 어리석은 부자처럼 되지 않아도 된다. 저축하는 일은 돈을 우리에게 주신 선물로 바르게 평가하는 일이므로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다(약 1:16-17). 돈을 무계획적이거나 충동적이거나 어리석게 써 버리기보다는, 지혜롭게 저축하는 일이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더 잘 관리하는 일이다(눅 12:47-48). 청지기 사명을 바로 감당하는 일은, 중요하게 돈을 필요로 할 경우를 대비하여 미리 저축을 해 놓고 있으면, 그때 당신이 더 잘 도울 수 있는 입장이 되게 하는 것이다(엡 4:28). 그러면 당신은 더 빨리 그리고 더 의미 있는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잠 3:27). 저축은 유산을 남길 수 있게 하고, 당신의 후손들을 축복하여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될 수 있게 한다(잠 13:22). 3. 지체하는 것은 실수하는 것이다우리는 모두 일을 미루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일찍 저축하지 않으면, 비과세 혹은 복리 이자 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강력한 재정적 힘을 잃을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축을 미루는 이유는 저축하는 일보다 더 우선적인 일이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더 많은 가처분 소득을 기대하기 때문에 저축을 미루고 있을 수도 있지만, 보통은 당장의 부채를 청산해야 하거나 저임금으로 인해 수입이 적기 때문이다. 즉 의료 비용 및 자녀 교육비 등 더 긴급한 필요를 먼저 채워야 하기 때문에 저축은 나중으로 미룬다. 하지만 처리해야 할 우선순위가 바뀌더라도 저축은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은퇴를 대비하며 저축하는 일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돈이 쌓일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마 25:27). 그 의미는 당신이 오늘 저축을 시작하면서 들어가는 돈에 비하여, 저축을 늦게 시작하면 결국 더 많은 돈이 들어가게 된다는 뜻이다. 당신이 할 수 있는 만큼으로 바로 저축을 시작하라. 그러면 그 금액은 시간이 지나면서 추진력을 얻어 조금씩 늘어난다. 4. 부채는 가정 경제를 쇠약하게 한다성경은 빚에 대해 침묵하지 않는다. 예수님 시대에는 신용 카드나 자동차 구입 자금 대출은 없었지만,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일이 흔히 있었다. 성경은 빚을 엄격하게 금하지는 않지만, 빚진 상태를 종으로 구속되는 한 형태로 묘사하고 있다(잠 22:7). 그 밖에도, 과잉 지출과 너무 많은 부채 및 낮은 저축률 사이에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다. 부채에는 대가가 따른다. 부채를 청산할 때 지불하는 돈은 빌려준 사람에게 가기 때문에, 이는 그 외의 것을 위해서는 사용할 수 없는 돈이다. 이것을 부채의 ‘기회비용’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천만 원을 빌리고 12%의 이자(120만원)를 지불하는 경우와 천만 원을 저축하여 그것으로 6%(60만원)의 수익을 거두는 경우를 비교해 보라. 실제 경제적 차이는 18%(180만원)이다. 5. 지혜로운 투자는 바르고 좋은 일이다 투자는 주식 거래가 아니다. 건전한 투자는 처남이 알려 준 비밀 정보로 집을 담보하여 무리하게 돈을 집어 넣고 요행을 바라는 식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미래에 일어날 일을 추측하여 요행을 노리고 돈을 투자하는 일은 대부분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잠 28:19; 딤전 6:10).지혜롭게만 하면 투자를 통해 실제로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다. 투자는 사람들을 고용하여 제품을 내놓거나 소비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실제 사업에 돈을 넣는 것을 말한다. 바른 투자는 우리가 투자한 회사들이 잘 경영하여 투자한 금액에 상응하는 만큼의 돈을 돌려주기를 소망하는 것이다(잠31:10–31; 전 11:1–6).투자에 대해 잘 모르는 평범한 개인은 주식이나 채권에 투자하기보다는, 비용이 적게 들고 간접 운용되는, 뮤추얼 펀드 및 상장 지수 펀드(ETFs)에 투자하는 것이 좋다. 또한 수익에 큰 부담이 될 수 있으므로 높은 수수료와 비용이 드는 투자 상품은 피하고, 가능한 다각적으로 투자하며, 충동적으로 매매 타이밍을 결정하는 일은 삼가는 것이 좋다. 투자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므로 모르는 투자 상품은 사지 말아야 한다. 6. 유혹에 의해 저축할 수도 있다두려움이나 탐욕으로 혹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으로부터 독립하고 싶은 갈망 등과 같은 잘못된 이유로 저축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다.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저축하는 일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 된다(딤전 6:17). 탐욕으로 하면 저축의 모든 이점을 놓치게 된다(잠 1:19; 막 8:36; 눅 12:15). 그리고 어느 정도 부를 획득하고 난 다음, 전도서 5장 13절의 구두쇠나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처럼 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이 두 경우 모두 그들이 저축한 일 자체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이 자신에게만 집중한 것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보다 부요함을 신뢰한 것이 문제였다. 부를 단지 쌓아 놓기만 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생산적으로 사용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는 위험을 감당하기보다는, 부를 보존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혀 그들의 삶을 소모하게 된다. 그것은 저주(잠 11:26)와 심판(눅 12:16–21; 약 5:3; 시 39:6; 전 5:13; 슥 9:3)을 초래한다. 7. 균형이 핵심이다적절한 균형을 찾는 일이 핵심이다.따라서 미래를 대비하여 지혜롭게 투자해야 하면서도, 너그럽게 나누어 주고 하나님께 의존해야 한다. 공급의 원천이며 우리의 미래를 지배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어떤 결정을 하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관대하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은혜와 사랑이 많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말이다(시 107:8-9). 또한 성경이 말하는 지혜에 근거하여 저축과 투자를 해 나갈 필요가 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7 Biblical Principles for Saving and Investing Your Money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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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포스트모던 시대에 무엇을 알고 있는가
by Don Carson
2019-10-03
한 15년 내지 2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이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해 많이들 이야기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정도로 이야기하진 않는다. 35년 전에 서구권에서 영어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라면 셰익스피어(Shakespeare)나 키츠(Keats) 또는 프로스트(Frost)보다도 리오타르(Lyotard)라든가 데리다(Derrida) 혹은 푸코(Foucault)의 글을 읽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들였다. 당시에 성숙한 독서란, 역사나 문화라는 고정된 틀에서 본문을 해석하기보다 독창적인 해체주의의 관점으로 그 본문을 비평하는 활동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영어 본문 자체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된 내용은 포스트모던 이론이었다.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나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책을 독서 과제로 읽는 학생은 과거에 비해 훨씬 줄어들었다. 그와 같은 포스트모던 인식론의 창시자들이 대학의 교과 과정에서 한쪽으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참고로 인식론이란, 지식의 습득 가능성 내지 그 방법이나 범위 등을 논하는 철학의 한 분야이다).그러나 이런 변화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이 거의 사라졌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 대신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은 이와 같다. 곧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들이 마치 기정된 문화적 현상처럼 수용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떤 의문을 가진다거나 그 현상의 정당성을 입증해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왜 문화의 대세가 이미 명백한 사실로 수용하고 있는 입장을 굳이 변호해야 할 필요를 느끼겠는가? 따라서 그 결과, 스스로가 포스트모던 세대인지도 모를 뿐 아니라 한 세대 전만 해도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은 문학이나 논쟁에 대해서도 거의 아는 바가 없는 수많은 포스트모던 세대의 젊은이들을 보게 된다. 그들은 포스트모던 이론이나 비평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으면서도 그 사상의 수많은 부분을 그냥 전제하며 살아간다.이 상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예를 한번 들어 보겠다. 최근 웨스트코스트대학교(West Coast University)의 일부 학생들이 어떤 설문 조사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 대학교의 다른 학우들에 의해 용의주도하게 제작된 그 설문은 해당 학생들이 일반 종교에 대해, 특히 기독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보고자 하는 테스트였다. 그리고 그 질문 중 일부는 다음과 같이 사후 세계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다. “장차 당신이 누리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는지 무엇을 통해 알 수 있습니까?” 이런 질문에 대해 적지 않은 학생들은 이렇게 답변했다. “어떤 것을 안다는 주장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또한 “(요한복음 14장 6절이나 사도행전 4장 12절과 같이) 기독교가 내세우는 배타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둘 중 하나의 반응으로 답변했다. (1) “기독교인은 상당히 편협한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독특한 방법으로 영성을 추구합니다. 기독교인은 다른 종교들의 주장을 배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2) “깊이 파고들면 모든 종교는 결국 동일한 진리를 가르칩니다. 그러니 다른 종교들이 유별난 차이를 지닌 것처럼 열등하다고 판단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물론 이런 입장을 나타내는 분위기가 전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신앙’의 의미에 관한 이 시대의 견해, 변질되고 있는 ‘관용’의 개념, 또 누군가 그럴듯하게 표현했듯 “겉으로 드러나는 맹렬한 적개심 뒤로 거대한 바다처럼 냉담한 마음을 숨기고 있는” 더 넓은 문화적 흐름이 또 다른 영향을 미친 게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포스트모더니즘이 현대 인식론에 미친 영향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우리 역시도 명백히 주어진 진리를 회피하는 자세를 취하고 말았을 것이다(즉 무엇보다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웨스트코스트대학교 학생들은 친절하게도 그 설문 결과를 나에게 전달해 주었는데, 그때 나는 그 학교에서 열리게 될 전도 행사에 참여하려고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전달된 설문 결과를 보며,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금방 발견하게 되었다. 곧 설문에 대한 그러한 반응은 자기 자신을 무신론자나 세속주의자로 지칭한다든가 혹은 비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상당수의 학생들이 지닌 입장만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신앙을 용기 있게 나누고자 해도 그런 질문에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를 모르는 수많은 크리스천 학생들 역시 그와 같은 반응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그 두 부류의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설명을 여기에 제시하도록 하겠다.1.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지에 관한 논의들은 사실상 잘못된 기준에 근거하여 이뤄질 때가 많다. 그런 논의들은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 모든 것을 알지 않는 한, 그 대상에 대해 무엇도 확실히 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이는 소위 ‘신해석학’(New Hermeneutic)이라고 불리는 다소 오래된 관점에 근거한 논리이다. 물론 어떤 대상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일은 불가능한 기준이다. 그런 주장은 우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전지(omniscience)의 상태에 있어야만 비로소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논리를 보여 준다. 또는 오직 그 전지성만이 진정으로 무엇인가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라는 논리를 드러낸다. 물론 절대적인 차원에서 보면, 그 주장은 옳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말을 자주 하며, 그때 우리는 그런 전지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인간의 지적 조건에 적합한 여러 형태의 지식을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이는 성경이 인간에게 적용하는 원리일 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이다. 우리는 지구가 자전축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과 그 결과 내일 아침에는 해가 떠오른다는 사실을 ‘안다.’ 또 나는 개인적으로 한 시간 후면 내가 탑승할 유나이티드 항공편이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이륙하게 된다는 사실을 ‘안다.’ 물론 이에 대한 나의 ‘지식’은 유나이티드 항공편 스케줄을 게시하는 전광판과 스마트폰 앱을 통해 확인된 정보에 근거하고 있다. 그래서 탑승을 기다리다가 다른 항공편 스케줄이 변경되었다는 방송을 듣게 되면, 약간의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내가 이용할 항공편 스케줄도 변경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혹 내가 전지성을 지녔다면, 처음부터 그런 혼란을 겪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완전한 지식은 없을지라도, 나는 지구가 자전하고 있으며 유나이티드 항공편은 다른 통지 사항이 없는 한 오후 6시에 이륙하게 된다는 전제에 따라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이는 마치 다윗 왕이 예루살렘에서 통치했다든가 예수님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현재 일어나는 일들을 ‘알기’ 때문에 계획 가능한 것이다. 이 앎은 하나님만 가질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 인간의 지적 조건에 적합한 수준에서 가질 수 있는 지식이다. 따라서 전지성이라는 기준을 수용하여 지식의 여부를 논하는 것은, 인간의 경험과 지식이라는 용어에 함축된 일반적인 개념에 상반되는 접근이다.2. 위의 설명을 통해 나는 유한한 존재로서 우리가 지닌 한계 및 오류 가능성은 인간의 지식이 결코 전지성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엇인가를 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이 동일한 결론에 이를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우리의 학습이 과연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우리가 고대 그리스어라든가 셰익스피어의 시 또는 미생물학 등을 배우는 새로운 학습 과정에 착수하게 되면, 그 시작 단계에서부터 배우며 암기해야 할 내용이 많아 큰 부담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다 보면, 처음에 우리를 기겁하게 만든 그 내용들이 이미 자연스럽게 습득된 상태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더 이상 뤼오(λύω) 동사의 현재 직설법 변화를 생각하느라 애쓰지 않아도 된다. 이미 그 변화를 ‘알기’ 때문이다. 물론 다 알지 못하는 그리스어 문법 사항이 많이 있겠지만 말이다. 이런 원리는 성경이나 신학 공부만이 아니라 모든 학습 과정에 적용된다. 다시 말해 학문의 영역이든 사업의 현장이든 우리가 무엇인가를 학습할 때 경험하는 일반적인 과정은, 인간의 지식이 부분적일지라도 그 자체로 획득될 수 있는 지식임을 말해 준다.3. 흔히 성경 해석이 다양한 입장으로 나뉜다는 사실을 들어,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곤 한다. 이런 결론은 다음의 두 가지 입장 중 하나가 사실일 때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1) 성경은 그 자체로 여러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을 뿐 일관된 메시지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란 불가피하다. (2) 성경은 이론상으로 오직 하나의 메시지를 지니지만, 교회 역사는 우리가 그 단일한 메시지에 아무 이견 없이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여기서 어느 입장을 취하든,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어떤 입장을 취하더라도, 그 질문에 대해 정당한 답변을 할 수가 없다. 우선 (1)은 성경이 무엇인지를 문제 삼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지금 이 자리에서 상세히 다룰 수가 없다. 다만 (2)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내용은, 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또 이는 흔히들 하는 경험이기도 한데),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하여 수많은 합의가 이뤄질 수 있다는 사실에 자주 놀라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는, 성경이 최종 권위이며 이 권위에 따라 자신의 견해를 기꺼이 수정할 수 있다는 원칙에 대화를 나누는 당사자들이 동의를 한 상태여야 한다. 한때 나는 세계복음주의협회(The World Evangelical Fellowship)라고 불린 모임에 참석하며 10여 년 간 즐거운 세월을 보냈던 적이 있다. 그 협회는 매우 다양한 학파에서 모인 사람들로 구성되었는데, 거기서 나는 고된 연구, 끈기 있는 토론, 상호 비평, 겸손한 자세, 자신의 생각보다 성경 본문에 더 충실하고자 하는 마음을 통해 얼마나 많은 합의가 이뤄질 수 있는지를 보았고, 이에 끊임없이 놀라워하며 기뻐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4. 지금까지의 인식론적 논의들은 지식의 습득에 대한 도전을 본질상 중립적인 문제로 여기고 다뤄 왔다. 그렇기에 해석학 전문가들은, 진리를 알기 위해 시도하는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도덕적 해악이라든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취지에서 빠질 수 있는 우상 숭배의 위험이나 장애에 대해서는 지면을 거의 할애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무신론자와 토론하며 성경이 그런 문제에 대해 과연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생각해 보는 일은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시 14:1). 이런 토론은 신앙을 보수하는 학자들이 반사적으로 상대를 얕보며 다가가려는 성급한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자신을 광범위하게 드러내셨는지 또 무신론자들이 얼마나 그런 계시를 가볍게 여기는지를 진지하게 평가하는 접근으로 이뤄져야 한다. 나의 요지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포스트모던 시대의 인식론에 대한 성경적 반응이 어떤 논의에서든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Postmodernism That Refuses to Die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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